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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 얼간이>, 각자의 방법
    波瀾 • 破卵 2019. 6. 27. 18:44

     

     

    논리와 사고 프로토콜: <세 얼간이>, 각자의 방법

     

    분명히 란초가 추구하는 가치들은 매력적이다. 고난에 닥쳤을 때 알 이즈 웰을 되뇌이며 마음을 다스리고 어떻게든 그 상황을 개선해내는 그의 모습은 영화라는 매체의 특성상 극적인 연출이 가미된 덕택도 있겠지만 어찌됐건 대단하다는 인상을 주는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인도 영화라는 점을 감안해서 우리가 그동안 봐왔던 영화들보다 더 극적인 연출이 많다는 것을 고려해도 이해하기 힘들었던 지점은 바로 이 영화가 차투르라는 캐릭터를 소비하는 방식이었다.

     

    <세 얼간이>에서 차투르는 비루의 뒤를 잇는 비주류적 안타고니스트 역할을 맡고 있다. 비루가 가시적인 영역에서 주인공을 훼방한다면, 차투르는 심리적인 영역에서 주인공과 적대관계를 선점해 우열을 가리려는 시도로서 적대자의 캐릭터성을 지닌다. 서사가 진행되도록 스타트를 끊어주는 것은 차투르의 비뚤어진 욕망의 발현이다. ‘10년 뒤, 누가 더 잘 사나 두고보자!’며 란초에게 적대심을 품고 지내온 차투르는 10년이 되는 날, 파르한과 라주의 일상을 깨뜨리며 등장한다. 파르한은 비즈니스를 중단시키고, 라주는 바지도 입지 못한 채 차투르의 부름에 응해야만 한다. 이유는 차투르라는 캐릭터의 비범함때문이 아니라, 란초의 등장을 예고받았기 때문이다. 차투르는 사실 실질적으로 안타고니스트라고 분류할만큼 안타고니스트의 역할을 잘 수행해내는 캐릭터는 아니다. 옹졸하고 치졸하고 심보가 못되긴 했지만, 얼만큼 악하냐 하면 악하다고 수식할만한 인물은 아닌 것이 그이다. , 그는 막상 치졸한 속내를 꺼내 쓸래도 그만큼 약지 못하다. 그런 차투르에게 안타고니스트라는 역할을 준 이 영화가 나는 조금 야속하게 느껴졌다.

     

    영화를 보다보면, 차투르가 왜 갑자기 등장해 파르한과 라주의 일상을 파괴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온다. 사실 처음의 차투르는 란초와 적대적인 관계가 아니었다. 둘은 추구하는 바가 달랐고, 그 사이에서 자신의 입장을 갈등했던 라주가 차투르의 것에 동조하려 들자 란초가 라주를 깨우쳐주려는 사건에서 둘의 관계는 틀어진다. 란초는 <세 얼간이>에서 거의 신격화된 존재다. 영화의 메시지를 관통하는 란초의 가치관, 전능한 능력 그리고 그를 절대적으로 지지하는 인물들이 만들어낸 영화의 분위기는 차투르의 삶을 틀렸다고 말하는 듯 하다. 그 단어를 영화가 직접적으로 내뱉지는 않지만, 분명 그런 시선이 형성되어있다고 나는 느꼈다. 자신의 삶을 자신의 방법대로 꾸려나가는 차투르는 왜 란초의 의도에 희생되어야했는가 의문이 들었고, 영화는 그 방법에 대해 전혀 비판적인 시각을 내포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실망스러웠다. 란초의 가치 판단과 다른 방향점을 지향한다는 이유에서, 라주를 설득하는 화소를 마치 그가 엄청난 발견과 발전을 이룩하도록 란초라는 절대자가 이끌어준 것처럼 연출하는 것이나 지극히 평범하고 열성적인 차투르의 방향성에 홍기를 들고 횡포를 놓는 것이 불편했다. 영화에 나온 장면들을 통해 단편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차투르의 안타고니스트로서의 각성은 란초에 의해 발현된 것이라는 점이다. 그 사건 전까지 차투르는 열심히 공부하고 좋은 곳에 취업하고 인정받는 삶을 사는 것을 순수하게 갈망하던 인물일 뿐이었으니 말이다.

     

    차투르, 란초, 파르한, 라주, 피아, 비루 모두에게는 각자의 방법이 존재한다. 물론, 비루의 교육 방법이 학생들에게 부정적을 영향을 끼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비루의 캐릭터가 갖는 부당성이 영화가 이러한 전개를 갖는 것을 합리화하지는 못한다. 차투르를 이런 방식으로 소비하는 것에 대해 영화가 어떤 죄책감도 갖지 않는다면 오히려 영화가 추구하는 메시지성이 더 떨어질 것이며, 또 나는 그렇게 느꼈다. 당신께는 당신의 방법이, 나에게는 나의 방법이 있다. 그리고 그 방법이 각자의 방법이 되기까지는 어떤 수많은 상황과 사유의 시간들이 존재했을 것이다. 그 누구도 각자의 방법각자에게 시사하는 바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다. 사실, 타인의 방법을 이해하는 것이 엄청난 의의를 갖는다거나 우리 삶에 필수적인 일은 아니다. 우리는 그저 각자의 방법을 존중하면 될 뿐이다. 란초, 파르한, 라주에게도 그런 시선이 공유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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