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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무새 죽이기>, 진실의 정당성波瀾 • 破卵 2019. 5. 11. 14:59
논리와 사고 프로토콜: <앵무새 죽이기>, 진실의 정당성
‘100분 토론’만 봐도 사람들은 저마다의 의견에 정당성을 부여하며, 언쟁같은 토론을 벌인다. 그리고 그 토론은 매주 방영될만큼이나 주제거리도, 의견도 다양하다. 많고 많은 시간 속에 내가 정당하다 느꼈던 진실은, 늘 누군가에게 반박 당한다. 내 정당성은 상대에 의해 부정되고, 내 진실은 그에 의해 배반된다. 물론 상대도 마찬가지다. 그럼 우리는 진리가 없는 이 곳에서 무엇을 진실로 여겨야하는걸까.
영화 ‘앵무새 죽이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당위의 모호함에 대해 꼬집는다. 옳은 것은 무엇이며, 그 근거는 얼마나-어디까지 공정할 수 있는지, 또 그대의 당연함이 실로 당연한 것인지를 계속해서 캐묻는 듯 하다. 영화는 인종, 장애, 성별, 빈부, 나아가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까지도 다룬다. 별 특별한 것 없어보이는 마을 안에서 이렇게나 많은 이야기에 귀 기울여볼 수 있는 이유는, 평범하고도 현실적인 그 공간에 수많은 개체가 살고있기 때문일 것이다. 각각의 개체는 저마다의 특성을 갖기 마련이다. 그 연장선으로 모든 개체는 둘 이상 동일한 것이 존재할 수 없으며, 이는 ‘차이’라는 단어로 축약될 수 있겠다.
인간, 동물, 흑인, 백인, 장애인, 비장애인, 여성, 남성, 기호식품을 즐길 수 있는 자, 하루하루 끼니 걱정을 해야만 하는 자. 이것은 단편적인 나열에 불과하다. 인간 중심 사회에서 형성된 보편성을 근간으로, 많은 경우의 수를 배제한, 지극히 이분법적인 분류이고 나열이다. 우리는 실재하는 개체를 세분하는 것조차도 간단하지 않다. 시간이 흐를수록, 너와 나 사이의 존재는 무한히 증식한다. 너와 나는 그 옆에서, 어쩌면 밖에서, 멈춰있다.
우리는 얼마나 더 많은 언쟁같은 토론을 벌여야 정당한 진실에 도달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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