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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극: 운명의 <오이디푸스 왕>
    波瀾 • 破卵 2019. 4. 4. 00:18

     

    서사 이론 발표문,  비극: 운명의 <오이디푸스 왕>

     

     

     

      <오이디푸스 왕>을 이야기하기 전, 우리는 이것이 신화이자 비극이라는 점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오이디푸스 왕은 연극의 한 종류인 비극작으로서, 소설과는 다르게 서술자가 없이 등장인물들의 대화나 송가, 답송으로만 이야기가 전개된다. 비극작의 경우, 인물들의 대화가 중심플롯을 이루는데 반해, 코러스 부분은 줄거리의 구성에 필수적이지 않는 화소로서 생략 가능하나 필요한 역할을 한다. 극작은 서술자가 부재하기에 이야기가 진행되는 데에 인물의 대화가 필수적이고, 따라서 대화형식의 내용 대부분이 근간화소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리고 코러스와 같은 기타 서술들은 분위기를 고조하는 등 플롯을 구성하는 데에 보조적인 역할을 하므로 자유화소로 분류할 수 있다. 소설에서는 대화체와 서술의 영역이 근간화소와 자유화소로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는데 비해 비극작에서는 꽤 구분이 확실한 편이다. 하여 본문에서는 답송, 송가, 코러스보다 인물들의 대사를 중심으로 분석하고자 한다.

     

     

     

    1. 반전 플롯과 역순행적 구조의 관점에서

     

     이야기는 역순행적 구조로 전개된다. 나라에는 우환이 가득하고, 오이디푸스 왕은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문제의 근본을 가늠하려한다. 때문에 꼬리에서 머리로, 또 꼬리에서 머리로 그 과정이 이어지며 오이디푸스는 이 상황을 빚어낸 사두에 자신이 있었음을 깨닫고 절망하며 이야기가 마무리된다. 이러한 역순행적 구조는 추리서사에서 많이 쓰인다. ‘오이디푸스 왕은 추리소설로 분류되는 작품은 아니나, 추리서사구조를 갖는 셈이기는 하다. 추리서사에서의 진행은 여러 화소들이 엮여있는 하나의 서사에 대해 인물들이 인과성을 짚어가며 맨 앞의 화소를 추측해내가는 그 과정이 핵심이다. 따라서 작자와 독자는 인물들이 회소들을 서술하는 방식에 있어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추리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바로 사건의 서술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어떤 사건을 이야기로서 전달할 때, 진술법에 대한 선택의 과정을 거친다. 서사적 사건의 진술에 초점을 맞출 것인지, 어떤 상태나 모습에 초점을 맞출 것인지, 혹은 둘을 어떻게 적절히 배치할 것인지를 고민한다. 의도하고자하는 바에 알맞게 전달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선택적으로 이루어진 진술이 더욱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이때 고려되는 요소를 과정진술과 정태진술이라 부른다. 이 두 가지 진술방법은 추리소설에서 강하게 드러난다. 예를 들어, 살인 사건의 범인을 잡는 이야기에 대해 생각해보자. 일의 진상을 파악하고자하는 여러 인물들은 한데 모여 각자가 알고있는 사건의 화소를 공유할 것이다. 이때, 범인의 인상착의, 사건 현장의 모습 따위에대한 서술은 정태진술의 특성을, 사건의 정황이나 범인의 범행 동기 유추와 같은 것들은 과정진술의 특성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소설이나 영화를 통해 추리 서사에서 화소의 전달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파악하고 있다. 그 과정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추리 과정이 더 미궁으로 빠져드는 경우도 종종 볼 수 있는데, ‘오이디푸스 왕이 그러하다.

     

    오이디푸스: 어디서 살해되었는가? 여기 궁전에서? 아니면 시골에서? 아니면 외국에서?

    크레온: 신의 조언을 듣고자 여행길에 나섰던 거라고 하시더군요. 그러고는 다시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

    오이디푸스: 그런데 아무런 신고도 없었소? 함께 여행하던 자로 수색에 도움이 될 만한 단서를 알고 있었던

    자도 없었오?

    크레온: 모두 죽고, 공포에 사로잡힌 사내 한 명만 살아남았는데,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거의 아무 말도요.

    오이디푸스: 그래 조금이나마 뭐라 했소? 하나의 단서가 물꼬를 틀지도 모르니, 한 줄기 빛을 찾는다면 얼마나 좋겠느냐.

    크레온: 그자의 말로는 도적 떼를 만났다는데, 그들이 라이오스 왕을 죽였다고 합니다.

    오이디푸스: 도적 한 놈이 감히 할 짓은 아니지. 그자에게 뇌물을 건넨 공모자들이 테베에 있다면 모를까.

     

    이 부분은 오이디푸스 왕의 도입부이다. 라이오스와 그 일행을 만났던 것은 도적 떼가 아닌 오이디푸스 하나였다. 생존자의 거짓된 과정진술 하나가 서사의 시작에서 모두를 사건의 진실로부터 멀어지게했고, 서사의 핵심인 추리 과정 내내 등장인물들이 그 주위를 뱅글뱅글 돌게 만든 것이다. 이렇듯 추리 소설에서 진술은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오이디푸스: 이오카스테, 당신이 언급한 말 한마딛가 날 공포로 몰아넣고 내 영혼을 뒤흔드는구려.

    이오카스테: 어재서 그렇죠? 제가 드린 어떤 말씀이 두려우신 거죠?

    오이디푸스: 라이오스 왕이 세 갈래 길이 만나는 곳에서 살해당했다고 하지 않았소?

    이오카스테: 그렇다고들 합니다. 사실 지금도 그렇게들 말해요.

    오이디푸스: 그렇게 길이 만나는 장소가 어디오?

    이오카스테: 포기스라는 시골인데, 델피에서 나온 길과 다올리아에서 나온 길이 만나는 곳이에요.

    오이디푸스: 그 사건이 일어나고 몇 년이나 흘렀소?

    이오카스테: 시에서 당신께 왕관을 씌워드리기 직전에 테베에 그 소식이 전해졌죠.

    오이디푸스: , 제우스 신이시여, 제게 어떤 운명을 지우신 겁니까?

    이오카스테: 무엇 때문에 그렇게 두려워하시는 거죠?

    오이디푸스: 잠깐, 라이오스 왕에 대해 말해주시오. 나이가 어떻게 되었지? 어떤 모습이었소?

    이오카스테: 키가 크고, 흰 머리가 나기 시작했죠. 외모로 보면 당신과 다르지 않았어요.

    오이디푸스: , 이럴수가! 그렇다면 내가 아무것도 모르면서 나 자신에게 잔혹한 저주를 퍼부은 꼴이 된 거란 말인가?

     

    오이디푸스는 이후 이오카스테에게 라이오스 왕이 살해당한 장소와 시기에 대한 과정진술과 라이오스의 생김새에 대한 정태진술을 통해 사건의 정황을 재확인하게되고, 자신이 그 범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에 한 걸음 가까워간다.

     

    추리서사는 이야기의 이중성을 기본적인 구조로 채택하며 두 가지 대립을 전제로 한다. 하나는 텍스트 내부의 대립으로서 탐정과 범인의 대립이고, 하나는 텍스트 외부의 대립으로서 작가와 독자의 대립이다. 이러한 대립의 구도는 플롯의 구성방식이나 구체적인 서술 방법을 결정한다는 점에서 전통적 추리소설의 서사적 특성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특히 텍스트 내부의 대립은 직접적으로 이야기의 이중성과 관련된다. 플롯이 전개되는 동안은 인물간의 갈등 관계가 변모하지 않고 대립의 두 축을 형성하는 탐정과 범인이 결말까지 고정된 역할을 담당한다. 탐정과 범인의 대립은 갈등에 따른 인물의 변모가 아니라 범죄와 관련된 수수게끼를 중심으로 해서 전개된다. 이 때 논리적 추리 과정을 통해, 탐정은 조사를 하며 이 과정을 체험하면서 독자들은 탐정과의 동일시를 지향하게 된다. 그리고 해결의 공표가 서술되기 전까지 작가에 의해 의도적으로 조작되거나 은폐된 정보나 복선 등이 독자와 작가를 대립하게 만드는 구도를 낳는다. 이런 작가의 의도는 반전의 플롯을 가능하게 하고, 반전의 플롯이 서사가 긴장감있게 끌고 온 대미를 장식하여 독자/관객을 만족시킨다.

     

    오이디푸스 왕은 이러한 구조적 관점에서 볼 때, 탐정과 범인이 동일한 존재이기에 이야기의 이중성과 반전감이 더 극대화된다. 오이디푸스는 테베에 해묵은 더러움을 가져온 범인이자 그 범인을 가려내기 위한 도전자(탐정)이고, 기만자이자 무지자이다. 이렇듯 고도의 이중성을 가진 오이디푸스가 탐정으로서 서사를 주도해나갔을 때, 그 끝에 범인임이 밝혀져 무지와 기만이 끝나고 자멸하는 순간을 마주하는 것은 관객에게 엄청난 반전을 선사할 수 있는 것이다.

     

     

     

    2. 내부적 관점에서

     

    <오이디푸스 왕>은 테베에 역병을 도래한 원인인 해묵음 더러움을 찾으며 시작한다. 그 범인은 바로 선왕 라이오스를 죽인 자이고, 그 사건에 대한 일의 진척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이유는 스핑크스 때문이었다고 크레온은 말한다.

     

    크레온: 짐작했던 바가 있었사오나, 재앙이 덮친 데다, 저희를 영도할 분이 안 계셨지요. 왕이 없었으니까요.

    오이디푸스: 재앙? 왕이 그렇게 쓰러졌는데도, 원인을 찾아보지 않았소? 도대체 걸림돌이 무엇이었소?

    크레온: 스핑크스이옵니다. 스핑크스가 수수께끼를 내어 저희를 더욱더 옥죄었고, 라이오스 왕께선 보이지도

    않으니 마음이 멀어진 셈이었지요.

     

    이야기 속 스핑크스는 한자리에서 테베의 국민들에게 같은 문제를 반복해 내어 시험에 들게 하고, 통과하지 못한 자들을 잡아먹는다. 그런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오이디푸스가 해결하며 스핑크스를 처치하는 데에 성공한다. 이 사건은 오이디푸스가 그의 운명으로 발돋움할 수 있도록 돕는다. 오이디푸스가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해결함으로써 테베의 시민들을 위험으로부터 구해내고, 영웅이 되어 라이오스의 공석을 차지해내 예언에 따라 그의 친모인 이오카스테를 아내로 삼을 수 있게 한다. 스핑크스는 오이디푸스가 예언에 더 가까워질 수 있게 해주는 장치인 것이다.

     

    스핑크스는 아침에는 네 개의 다리로 걷고 낮에는 다리가 두 개가 되고 밤에는 다리가 세 개로 변하는 생물에 대해 묻는다. 이 질문의 의도는 테베의 사람들(인간)에게 너는 누구인가?’라는 고찰을 제공하기 위함이다. 오이디푸스는 이 수수께끼에 인간이라는 정답을 건넨다. 인간인 오이디푸스가 인간이라는 답을 통해 스핑크스를 무찌르지만, 그것은 결국 운명에로 근접해가는 인간의 아이러니컬한 숙명적 모습을 담고 있다.

     

    , 스핑크스는 오이디푸스와의 묘한 일체감을 갖는 캐릭터이기도 하다. 그들은 모두 등장의 시점에서 테베의 외부인이자, 테베의 국민에게 위해를 가하고, 결국 몰락의 상태로 최후를 맞이하며 테베를 떠나야했다. 오이디푸스의 등장과 함께 스핑크스가 퇴장하는 전개가 마치 사기(邪氣)의 순환, 재생처럼 보이며 둘에게 일체감을 느끼게 한다. 때문에 스핑크스의 존재가 오이디푸스 왕의 추리서사를 구성하는 데에 있어 힌트를 제공해주는 듯해, ‘반전의 플롯이라는 이야기의 진실에 도달해갈 때쯤 스핑크스라는 이벤트가 흡사 복선 혹은 암시의 효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사정을 들은 오이디푸스는 국가의 회생을 위해 범인을 잡겠다 결심하며 이렇게 공표한다.

     

    오이디푸스: 살해한 자에게 저주하노니, 불쌍한 자여 참혹하고 불행하게 살게 되리라. 또한 내가 알면서도

    그자를 내 집에 받아들인 게 밝혀진다면, 그자에게 가한 저주가 내게도 닥치리라.

     

    그리고 오이디푸스는 예언자 테이레시아스에게 답을 구하고자 하지만 예상 외의 대답을 듣고 의문과 화만 갖게된다.

     

    테이레시아스: 그대가 바로 도시를 더럽힌 죄를 지은 자입니다.

    (중략)

    테이레시아스: 당신께는 제가 어리석게 보이겠지만, 당신 부모나 당신을 낳은 자들에게는, 현자였습니다.

    오이디푸스: 입 닥쳐라! 그들이 누구라고? 누가 내 부모였다고? 말해봐라!

    테이레시아스: 오늘에서야 당신의 탄생과 파면이 밝혀지는군요.

    (중략)

    테이레시아스: 드릴 말씀은 다 했습니다. 아무리 위협해도 절 겁주지도 해하지도 못할 것입니다. 제가 전하는

    말은 이렇습니다. 당신이 라이오스 왕을 살해한 죄로 저주를 하고 칙명을 내려 찾으려는 자가 바로 이곳에 살

    고 있습니다. 외지인으로 보이지만 원래 테베 출신이지요. 테베 출신이라는 점이 그에게는 별로 달갑지 않을

    것입니다. 눈이 멀고, 한 푼 없는 알거지로 전락하여, 타국 땅에서 지팡이에 겨우 의지한 채 살아가게 되고,

    저 자신이 친자식들에게 아버지이자 형제요. 자신을 낳은 어머니의 남편으로 제 아버지 대신 들어앉은 자이며,

    게다가 아버지를 죽인 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말입니다. ! 가셔서 이 말씀을 생각해보십시오. 제가 틀렸다

    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때 말씀하십시오. 그러기 전에는 저를 점괘에 무지한 자라고 욕하지 마십시오.

     

    이야기 진실의 전반을 모두 밝혀버리는 테이레시아스는 오이디푸스가 자신을 의심케하는 계기를 제공한다. 관객에게는 72p 분량 기준, 17p만에 이 일에 대한 내막을 모두 알려준 셈이다. 관객은 극의 초반에 이 사건의 내막을 모두 알게 되고, 추리과정에 흥미를 갖기보다는 오이디푸스가 파멸에 더 가까워져가는 그 모습 자체에 집중하게 된다. 오이디푸스는 범인을 저주하고 자신이 그 범인이라는 테이레시아스의 말을 부정한 채, 크레온을 의심하는 등 극단적인 모습을 보이기에 이른다. 오이디푸스는 신탁을 통해 자신의 운명을 이미 들은 적 있는 바, 본인이 테베 출신이자 자신을 낳은 어머니의 남편으로 제 아버지대신 들어앉은 자라고 주장하는 테이레시아스의 말을 아예 일리 없는 것으로만 취급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 심리적 혼란이 오이디푸스의 판단력을 흐리게 하고 극단적인 모습을 보이게 했던 것이다.

     

    이어서 소란에 등장하는 이오카스테는 오이디푸스를 안심시키려 시도하려하지만 이내 그녀도 불안감에 휩싸이게 되고, 코린트 양치기의 말을 통해 모두가 그 불안이 진실이었음을 확신하게 된다.

     

    코린트 양치기: 저도 폴리보스 왕도 폐하를 낳지는 않았습니다.

    오이디푸스: 그렇다면 무슨 이유로 그가 날 아들로 삼았느냐?

    코린트 양치기: 폐하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제 손으로 넘겨드렸지요.

    오이디푸스: 그리고 사랑을 베푸셨다? 제 자식도 아닌 나에게?

    (중략)

    오이디푸스: 그렇다면 내 친아버지와 친어머니는 누구셨소? 말해주시오.

    코린트 양치기: 모릅니다. 하지만 그자는, 저한테 당신을 넘겼던 그자는 알 것입니다.

    오이디푸스: 자네 말고 날 발견한 자가 또 있더냐?

    코린트 양치기: 그렇습니다. 다른 목동이 발견해서 저한테 넘긴 자입니다.

    오이디푸스: 누구냐? 그자를 아느냐? 그자의 이름을 아느냐?

    코린트 양치기: 라이오스의 사람이라고 하더군요.

    (중략)

    이오카스테: 제발, 당신 자신의 운명이 조금이라도 걱정된다면, 그 정도로 끝내세요! 내가 당하는 파멸로 충분해요.

     

    이야기 속 어린 오이디푸스는 발뒤꿈치/발목을 뚫어 꿰맨 뒤 버려진다.(판본에 따라 차이가 있다.) 영아기의 몸을 가진 오이디푸스의 발을 묶는 행위는 그의 활동성을 방해하고 탈주를 방지할 목적보다는 그가 가진 운명과의 분리를 방어하기 위함으로 보인다. 그가 생존에 성공한 뒤에 오이디푸스(부은 발)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는 것에 이어, 성장 이후로도 테베로부터 벗어나는 것, 나아가 운명(근친상간, 친부살해)으로부터 달아나는 것까지 금하는 장치적 역할을 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밝혀진 순간 이오카스테는 자살한다. 오이디푸스는 테베의 국왕 라이오스를 살해한 범인이 자신임과 친부 살해, 근친상간의 예언이 이미 이루어졌음을 깨닫고 스스로 눈을 찌른다. ‘눈을 통해 보는 것이 즐겁지 않다고 말하는 것을 보아 운명에 대한 절망적인 심정이 반영된 행동임을 알 수 있지만, 동시에 이는 도시의 정화와 구원을 위한 자가 징벌이며 시민과의 약속을 실행한 것이기도 하다.

     

     

     

    3. 비극으로서의 오이디푸스 왕

     

    신화라 하면 대개 전지전능한 신이 인간을 도와주거나 벌을 주는 식의 전개가 주인데, 보통 신에게 노여움을 사거나 인세(人世)에서 악행을 저지르면 저주를 내리는 형태의 벌을 주는 형식으로 이야기가 구성된다. 하지만 오이디푸스 왕오이디푸스라는 인물이 어떤 과오로 인해 예언 혹은 저주를 받아야만 했는가에 대해 의문을 갖게 한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오이디푸스의 친부인 라이오스에게서 찾을 수 있다. 오이디푸스가 태어나기 전, 그의 아버지 라이오스는 테베 국왕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 나이에 갖은 고초를 겪게 되어 피사의 왕인 펠롭스의 도움을 받는다. 펠롭스의 거처에서 지내던 라이오스는 이후 테베로 돌아오는 길에 펠롭스의 아들로서 용모가 빼어난 크리시포스를 납치·강간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펠롭스는 그의 조부인 제우스를 통해 라이오스가 아들에게 죽임을 당하리라는 저주를 내린다. (여기서 크리시포스는 라이오스에게 강간을 당한 충격으로 자살을 한다는 설도 있다.) 이로 인해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과오와는 관계없이, 출생부터 펠롭스의 저주를 이행하기 위한 집행자의 숙명을 지고 태어난 것이다.

     

    오이디푸스가 지닌 이 운명적 배경은 그리스 비극이 가진 의미와 결부된다. ‘비극의 사전적 정의를 찾아보면 인생의 슬픔과 비참함을 제재로 하고 주인공의 파멸, 패배, 죽음 따위의 불행한 결말을 갖는 극 형식이라 설명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리스 비극은 단지 공포와 연민을 불러일으키며 눈물을 자아내는 슬픈 연극이 아니다. 옛날부터 그리스의 사람들은 정력, 다산, 건강의 상징인 디오니소스에게 풍년을 기원하며 신전에 모여 제물을 바쳤고, 이때 제단을 둘러선 합창단이 노래를 불렀다. 신전에 모인 사람들은 불에 타 재가 되는 제물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죽음을 체험했으며, 나아가 정화와 부활의 기쁨을 누렸다. 그리고 여기에 배우가 추가되면서 점차 연극처럼 발전되었고, 우리는 이것을 비극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비극의 극장은 단순한 극장이 아니라 디오니소스의 신전이자 예배당이었고, 무대 위의 주인공은 제단 위에 바쳐진 제물과도 같았다. 비극을 연기하는 배우들의 모습에 관객은 자아를 일치시키고, 주인공이 운명의 한계에 부딪혀 실수하고 무너지는 체험에서 관객은 마찬가지로 죽음을 겪고, 마침내 제의적 카타르시스의 환희를 만끽하는 데에서 비극은 완성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오이디푸스 왕은 오이디푸스가 지닌 집행자로서의 숙명이 비극성을 더욱 효과적으로 나타낸다. 오이디푸스가 집행인이자 희생자라는 사실이 언급되지 않았을 때, 비극의 주제인 운명성과 그의 자유의지를 더욱 강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극에서 느껴지는 숭고함은 운명이 행해질 것을 알면서도 자유의지를 갖고 행동하는 인간의 모습이다. 오이디푸스에 대한 예언은 과오로 인한 것이 아니기에 그의 무결함이 더욱 강조되고, 이는 예언의 운명적 성질을 더 높여주며 운명에 대응하는 오이디푸스의 자유 의식 구조를 강화하면서 비극적 성질이 강조된다. ‘오이디푸스 왕의 후반부, 오이디푸스가 스스로 눈을 찌른 행위는 그 구조를 잘 보여준다. 신탁이 실행될 것을 두려워해 운명으로부터 도망치려 했던 오이디푸스가 운명에 대한 태도를 바꾸기 때문이다. 오이디푸스는 자해행위를 통해, 예언을 피해 도망 다녔지만 오히려 그것에 가까워져갔던 지난날의 대응 방식을 버리고, 운명이라는 존재를 수긍하되 순응하지 않는 방식을 택한다. 스스로를 운명에 결박되었으나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으로 인지하고, 운명에 의한 순간들을 순응하는 것보다는 자의적으로 맞이하고자 눈을 찔렀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비극 오이디푸스 왕은 이렇게 다각도에서 비극성을 관찰할 수 있기에 당대 그리스 사람들에게 큰 카타르시스를 선사했다. 오이디푸스는 제단 위의 제물로서, 그와 (그의) 운명의 관계를 지켜보는 관객들은 자신이 오이디푸스와 일체화되는 경험을 하고, 오이디푸스의 자유의지적 대응으로 하여금 제의적 카타르시스의 환희를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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