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트릭스>, 빨간약의 힘(power)
논리와 사고 프로토콜: <매트릭스>, 빨간약의 힘(power)
영화 <매트릭스> 중 가장 맴도는 장면은 단연 ‘빨간약과 파란약’이다. 네오의 질문에 답해줄 의향이 없어보이는 불친절한 모피어스 덕에, 도대체 저 약은 무슨 의미인가 더욱 집중해서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모피어스는 네오에게 다짜고짜 약을 건네며 빨간약을 고르면 이상한 나라에 남아 진실을 좇게 될 것이고, 파란약을 고르면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 믿고 싶은 것을 믿으며 살게 될 것이라 말한다. 그리고 네오는 빨간 약을 골라 진실을 알고, 매트릭스로부터 자유를 추구하는 전개를 펼친다. 결국 영화 '매트릭스'에서 추구하는 가치이자, 이데아는 '억압받지 않는 자연의 상태'인 것이다.
여기서 들었던 하나의 의문은 바로 약의 색 설정이다. 보통 붉은색은 부정, 위험, 경고, 악(惡)을, 푸른색은 긍정, 안전, 선(善)을 의미한다. 그런데 왜 매트릭스가 추구하는 방향성을 지닌 약의 색을 부정의 대표인 빨간색으로 설정했을까. 문득 그것이 네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위함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판도라를 자극한 제우스의 상자처럼 말이다. 진실이 무엇이든, 득과 실을 따져 판단할 만큼의 정보가 없는 상태에 놓였으니 호기심이라는 인간(네오)의 본능을 자극해 그 밖으로 이끄려는 것이 반(反)매트릭스 세력의 의도가 아닐까. 그리고 만약 네오가 파란약을 선택했다면, 매트릭스 속의 사람들 사이에 어울려 살아갈 수 있었을지에 대한 궁금증도 일었다. 예상컨대, 아마 그는 영화 도입부에 나오는 모습처럼 또다시 모피어스와 매트릭스의 실체 그 주변부를 계속해서 맴돌 것이다. 어쩌면 그런 선택은 이미 존재했고, 영화는 그 이후에 모피어스가 변수를 제공한 n 번째 경우의 수를 보여준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어진 빨간약에 대한 생각 속, 또 하나의 새로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페미니스트들의 ‘빨간약’이다. ‘페미니즘’이라는 워딩뿐만 아니라, 여권과 관련해 굉장히 많은 이슈들이 대두되고 있는 현재이기에, 나 또한 많은 관심을 갖고 공부해나가고 있는 요즘이다. 그런데 페미니즘과 관련해 웹서핑을 하다 보면 심심치 않게 ‘빨간약’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페미니스트들을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내 인생은 빨간약을 먹기 전과 후로 나뉜다.‘와 비슷한 맥락에 주로 쓰인다. 나는 이번 기회에 매트릭스를 처음 접했기에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 알지는 못했지만, 맥락을 보고 대략적으로만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매트릭스를 관람한 후, 다시 ‘빨간약’에 대한 글을 접했을 때 그 의미에 대해 진정으로 알게 되었다. 여성성, 남성성을 끊임없이 구분 짓고, 함부로 판단하는 것을 일삼고, 꾸미는 것을 여성만의 특권이자 경쟁력이라 여기는 사회 속에서 혼란을 느끼던 나의 지난날들이 떠올랐다. 나에게도 페미니즘은 빨간약이었다. 빨간약은 내가 기나긴 시간 동안 혼란을 느낀 이유에 대해 설명해줬고, 무엇을 지양하고, 무엇을 지향할지를 스스로 고민하고 판단할 수 있게 도와줬다. 하지만 영화에서도 그렇듯, 빨간약은 모든 일에 대한 해결책이 되어주지 않는다. 현재도 나는 수많은 분노와 갈등과 고뇌를 겪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네오가 빨간약을 선택해 얻은 삶 속, 죽음을 초월하는 믿음에 매트릭스와 현세를 아우르는 기적들을 쏟아내는 장면들이 멋있기도, 부럽기도 하다. 아직 속편들을 보지는 못했지만, 네오와 일행들이 믿음으로 하여금 끝내 사회를 변화시키는데 성공한다면 좋겠다. 매트릭스 시스템의 해체와 인류의 번영을 이룩하는 장면을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