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링 디어>
미디어와 스토리텔링 2: < 킬링 디어 >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킬링 디어>는 에프티미스 필리포, 요르고스 란티모스 각본의 스릴러, 호러 장르 작품이다. 제목을 통해 암시하고 있듯, 아가멤논과 아르테미스의 신화를 모티브로 삼은 내용이다. 영문의 원 제목은 < The Killing of a Sacred Dear >으로, 직역하면 ‘성스러운 사슴 죽이기’ 정도로 볼 수 있다. 이 영화는 비극 신화를 모티브 삼은 서사로서, 초현실과 아이러니적인 요소가 강하게 작용한다. 영화의 키워드를 꼽자면 아마 ‘초현실’, ‘아이러니’, ‘부조리’ 따위의 단어가 해당될 것이다. 작품의 매력 포인트이기도 한 앞의 키워드들을 통해 <킬링 디어>의 서사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킬링 디어’는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색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작품으로, 감상하고 나면 안티 플롯의 느낌이 강하게 인다. 하지만 차근차근 생각해보면, 그 어떤 플롯의 유형에 콕 집어 해당한다고 말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암담한 서사 전개와 고어스러운 이미지들로 비판적 인간관의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어쩐지 예술 영화 같고, 고답적인 내용일 것만 같은 이 영화는 사실 안티 플롯이 대표로 갖는 요소들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 비연속적인 시간의 진행, 우연성, 일관되지 않은 사실성 그 어떤 것도 확실하게 해당되지 않기 때문이다.
우선 영화의 주인공은 다수로 진행된다. 스티븐을 단일 주인공에 마틴을 안타고니스트로 볼 수도 있겠으나, 이것은 아가멤논—이피게네이아—아르테미스 신화에서의 주인공을 누구로 볼 것인가의 문제와 비슷하다. 아가멤논은 아르테미스가 아끼는 사슴을 죽이고도 아르테미스의 사냥 솜씨보다 자신의 것이 더 우월함을 뽐내다, 아르테미스의 화를 사 자신의 딸인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바치게 된다. 이때 이 이야기를 아가멤논의 관점에서 서술한다면 아가멤논이 주인공이며 아르테미스가 안타고니스트인 이야기가 될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스티븐을 그런 식으로만 비추지 않는다. 스티븐의 과오는 숨겨져 있으며, 이 서사를 진행하는 힘은 독보적으로 마틴이 제공하고 있다. 스티븐은 주인공으로서 사건을 해결하기위해 고군분투하는 캐릭터가 아니며, 오히려 그 제물로서 희생 당해야 하는 가족들과 힘의 세력 마틴에 의해 이야기는 진행된다.
의료 사고로 인해 아버지를 여읜 마틴은 영화 초반, 아버지의 담당 주치의였던 스티븐과 자주 만남을 갖는다. 둘은 썩 가까워 보이지는 않지만, 어쩐지 스티븐은 계속 마틴을 의식적으로 배려하려고 하는 눈치를 보이더니 마틴을 집에 초대한다. 가족들에게 마틴을 소개한 이후, 머지 않아 스티븐의 아들 밥은 다리에 마비가 온다. 하지만 검진에도 정상 소견만 나와 가족들은 혼란에 빠지는데, 이내 스티븐은 밥의 이상 증상과 관련한 마틴의 고백을 듣게 된다. ‘제 가족을 죽였으니 선생님 가족도 죽여야 균형이 맞지 않겠냐’는 마틴은 스티븐에게 누구를 죽일지 직접 결정하라고 이야기 한다. ‘안 죽이면 전부 앓다가 죽어요. 밥도 죽고 킴도 죽고 선생님 부인까지 전부 앓다가 죽어요. 하나, 다리 마비. 둘, 거식증. 셋, 안구 출혈. 넷, 사망. 총 4단계예요. 선생님은 안 죽으니까 걱정 안 해도 돼요. 며칠 내로 결정하세요. 3단계가 시작되면 … 출혈이 시작되면 몇 시간 내로 죽어요.’
영화 시작으로부터 50분 뒤에야 등장하는 마틴의 고백은 앞서 등장하는 수상하고 불미스러운 상황들을 더 황당하게 한다. 마틴과 스티븐의 이해할 수 없는 관계, 마틴이 스티븐의 가족들을 대할 때 도는 묘한 긴장감, 집착에 가까운 마틴의 언행,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밥의 이상 증세 등 일반적이지 않고 난해한 내용들이 이어지던 도중, 이 일의 장본인이 자신이며 이것은 합당한 대가를 치루는 행위임을 이해시키려는 마틴의 이야기는 이 상황을 더 미스테리하게 만든다. 서사는 명명할 수 없는 이질감에서 비롯된 내적 갈등을 계속해서 그려 나가다, 이 고백을 기점으로 본격적인 인물들의 대립 구조를 취한다. 가장 크게는 마틴, 스티븐이 중심 축을 갖지만, 킴(스티븐의 딸), 밥, 애나(스티븐의 와이프), 마틴, 스티븐 모두가 서로에게 적대감 내지는 불편함을 느끼게 되며 외적 갈등을 구현한다.
마틴의 고백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밥을 걱정하느라 스티븐과 의견 충돌이 계속 일던 애나는 절대적인 초현실의 능력을 지닌 마틴의 이야기를 듣고 태도를 바꾼다. 마틴에게 성적 호감을 느끼던 킴도 죽음 앞에 놓이자 그 감정을 이용하며 마틴에게 함께 떠나도록 자신을 고쳐달라 부탁하고, 이에 거절당하자 마비된 다리를 이끌고 집에서 탈출을 시도하기도 한다. 동생인 밥과 엄마인 애나에게는 계속 날을 세우고 경계하며 자신이 희생양이 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밥도 마찬가지로 스티븐이 좋아하지 않았던 자신의 긴 머리를 잘라버리는 등의 행동을 통해 살아남기위한 생존 경쟁에 합류한다. 이렇게 자신이 처한 상황을 벗어나기위해 스티븐의 가족들은 고군분투하지만 결국 스티븐은 아무 것도 결정하지 못하고, 밥이 극한의 상황인 4단계에 이르러서야 움직이기 시작한다. 가족들을 묶어 눈과 입을 가린 채 소파에 앉히고, 자신도 눈을 가리고 마치 러시안 룰렛을 하듯 방아쇠를 당긴다. 그 어떤 주체성이나 결정권도 가지지 못한 이 가족은 영화 내내 생존의 욕망을 추구하기 위해 작동하고자하나, 그럴 수 없는 한계를 경험한다. 활동적 인물임과 동시에 아이러니에 의해 실패만 반복되어 결론적으로 진보한 것은 전혀 없는 셈이 된다.
그렇게 어쩔 수 없이 선택한 러시안 룰렛을 통해 밥이 희생되고 이야기는 마무리 된다. 밥이 사망하고 셋만 남은 이 가족은 식당에서 밥을 먹는 모습을 보여주며 일상적인 생활을 보내는 것처럼 그려진다. 하지만 영화의 처음에서 그려지는 가족의 모습과 확연히 대조되는 그 모습은 그들에게 큰 변화가 생겼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이후 셋은 어떻게 살았을지에 대한 추가적인 궁금증은 그닥 남지 않는 이 서사는 닫힌 종말로 완결된다.
마틴의 절대적 권한은 어디서 어떻게 부여 받은 것인지 그 내막은 언급되지 않으나, 이 서사의 전체적인 맥락은 절대적으로 인과성이 결여되었다고 할 수 없다. 스티븐은 마틴의 아버지를 수술할 당시 취중에 수술을 집도한 탓에 사망하게 만들었고, 마틴은 그에 대한 보복을 위해 스티븐에게 똑같은 가족의 상실감을 맛보게 해줄 계획을 펼쳤다. 처음에는 자신의 아버지 대역으로서 스티븐을 탐내다가, 이후에는 그가 사랑하는 가족을 부수는 방식으로 말이다. 이러한 마틴의 서사 내 원동력은 인과관계가 충실히 갖추어져 있으며, 심지어는 스티븐 내지는 관객을 향해 직접 대사를 던지기도 한다.
‘이게 공평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나마 이게 정의에 가까워요.’ 마틴은 자신을 납치, 감금한 스티븐의 팔을 물어 뜯고서 말한다. ‘내가 사과해야 할까요? 아니죠. 그 상처를 만져 줘야 할까요? 살이 찢긴 상태라 더 아프기만 하겠죠. 둘 다 괜찮아지려면 방법은 하나뿐이에요.’ 그리고 다시 자신의 팔을 물어 뜯더니, ‘이제 알겠어요? 이건 비유예요. 비유로 예를 든 거예요. 상징 같은 거죠.’ 라며 자신의 정당성을 스티븐에게 이해시키려 노력한다. 마틴의 권능한 능력에 타당한 이유를 붙여줘야 한다면 이것을 우연성으로 분류해야겠지만, 사실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마틴이 어떻게 저런 능력을 갖게 되었는가’가 아니다. 마틴이 의도한 그 상황의 인과성이 중요한 지점이다.
이렇게 ‘킬링 디어’는 난해한 플롯 구조를 사용해 제대로 된 부정적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이런 맥락에서 이 영화의 장르가 스릴러, 호러로 분류되는지도 모르겠다. 추격전도 아니면서 스릴러이고, 귀신이나 사탄이 나오는 것도 아니지만 호러를 표방하는 이 영화의 정체를 좀 더 자세히 파악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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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대략적으로 언급된 내용들을 바탕으로 매직 이프를 정리해보자면, ‘만약 의료 사고로 아버지를 여읜 소년이 복수하기위해 초현실적인 힘으로 의사에게 가족 중 하나를 직접 골라 죽이도록 압박한다면, 생존을 위한 이기심으로 가족애를 잃고 한 명을 희생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가족의 형태는 파멸되고 말 것이다.’ 정도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주도적 아이디어에 해당하는 ‘생존을 위한 이기심으로 가족애를 잃고 한 명을 희생해 가족의 형태가 파멸로 이른다.’는 아이러니에 해당한다. 마틴의 강제성에 순응하지 않으면 스티븐을 제외한 온 가족이 죽게 될 것이기때문에, 다수의 생존을 위해 하나를 선택해야하는 처지에 놓인 주인공들은 결국 밥을 죽이게 된다.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는 이들은 다수의 생존과 가정을 유지하기위한 긍정의 가치를 추구하지만, 결국 부정의 가치로부터 분리되지 못하며 징벌 받는 형태로 이어져 부정적 아이러니를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밥을 제외한 인물들은 욕망을 성취하는 긍정성 이면에, 곧 그 성취 자체에 의해 파멸 당하며 부정적 아이러니를 완성한다.
각각의 인물이 표방하는 부정적 아이러니는 비슷한 듯 하지만 조금씩 다르다. 우선 애나는 밥의 건강이 악화되었을 때까지, 즉 마틴의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 가족이라는 공동체를 위해 행동하는 캐릭터이다. 가족이 그녀의 중심인 듯 비춰지는 몇몇 장면들은 애나가 보통의 드라마가 그리는 ‘엄마’의 역할을 잘 수행한다. 파티에서 스티븐의 컨디션을 챙기려 하는 것, 밥의 곱슬머리를 사랑스럽게 여기는 것, 나아가 마틴의 방문을 호의적으로 맞이하는 모습은 애나가 얼마나 평온한 일상을 지내고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자신도 곧 밥과 킴처럼 다리 마비에 거식증 증상이 올 것이라는 것을 인지한 뒤로 보여주는 모습은 그녀의 욕망을 강화시킨다. 애나는 밥의 증상을 해결하기 위해 MRI, PET, 정신과 진찰을 권하지만 스티븐에 의해 번번히 부정당하고, 그에 상응하는 별다른 대응을 보이지는 않는다. 스티븐에 한해서는 소극적이고 저자세를 취하는 애나였지만, 극한의 상황에 내몰린 뒤에는 다르다. 남편이 숨기고 있는 그의 진실(과오)을 밝혀내기 위해 당시 수술을 집도한 마취과 의사의 성행위를 대신해준다거나, 어떻게든 선택을 해내라며 스티븐에게 고함을 치고, 본인을 경계하는 딸 킴의 뺨을 때리는가 하면, 자신의 성적 매력으로 스티븐의 환심을 사려하는 등 이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인다. 결국 애나가 살아남게 된 것은 그의 노력 덕도, 스티븐의 배려도 아니었지만, 목표를 달성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가 이전부터 가꿔왔던 가정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다. 자신의 아들 밥은 죽었으며, ‘아이는 다시 낳으면 되니 둘 중 누구를 죽일지 고르자’는 말을 내뱉은 일은 무를 수 없다. 애나는 가족들과 절대 이전의 관계로 돌아갈 수 없게 된다.
스티븐은 영화 초반, 인간이지만 신적인 지위를 즐기는 인물처럼 그려진다. 사람의 생명을 쥐고 있는 외과의사의 지위를 만끽하며, 아내와 관계를 가질 때도 아내가 전신 마취된 사람처럼 누워있으면 스티븐은 신이 제물을 거두듯이 행동한다. 전신 마취 놀이를 하는 아내는 마취된 환자들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신적인 지위를 만끽하며 환자들을 대하는 스티븐의 권위적이고 군림하는 듯한 태도는 마치 아가멤논이 암사슴을 죽이고 자신의 전능함을 과시하며 아르테미스를 능욕하는 것과 유사하다. 이렇게 통제를 즐기며 살아가는 스티븐은 가족 중 하나를 죽여야 한다는 딜레마를 맞이한다. 여기서 스티븐은 엄청난 딜레마를 맞이 하며 무력함을 느끼고 인간의 지위로 내려오게 되는데, 극에서 스티븐이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인물로 그려지게 되는 것이 이 포인트 이다. 자신의 통제 아래 밥이 회복되지 않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며, 마틴이 자신의 존재를 알려도 인정하려 들지 않는 그의 모습은 스스로의 무력함을 납득할 수 없어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르테미스의 화를 사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바칠 것인가 하는 갈등에 휩싸인 아가멤논의 감정이 엿보이는 듯하다. 스티븐에게 마틴의 고백을 전해들은 애나가 오히려 마틴의 이야기를 더 믿는 모습은 스티븐이 얼마나 그 상황을 부정하려 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인간의 지위에서 선택하기를 강요 받자, 본인이 선택하기를 거부하고 가족 중 한 명을 죽일 때 완전한 우연에 의존하려 하는 마지막 장면은 스티븐이라는 캐릭터의 특성을 가장 잘 나타낸다.
마틴은 처음부터 계획에 있던 복수를 성공하는 긍정의 가치를 거머쥔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 장면, 스티븐의 가족들과 식당에서 마주친 채 밥을 먹는 마틴의 표정은 오묘하다. 아버지를 죽인 남자에게 복수를 하고 승리를 거머쥔 자처럼 보이지 않는다. 스티븐을 아버지의 대리인처럼 대하던 마틴은 결국 복수를 성공하는 대신에 그들과의 관계를 모조리 잃게 되기 때문일지 모른다. 자신의 것을 붕괴시킨 장본인이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고 있는 것에 질투를 느끼고 파괴하고 싶어하는 1차원적 욕망의 이면에는, 그 무리에 합류하고 싶어하는 부재의 대상을 향한 갈망도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모든 인물들은 결말에서 자신의 목표를 달성함과 동시에, 그 행동으로 하여금 스스로를 부정적 가치로 내몰며 부정적 아이러니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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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급한 것처럼 ‘킬링 디어’는 다수의 주인공을 세운다는 특성상 각각의 캐릭터 서사가 어느 하나에 치중되어 있지 않고, 갈등 구조가 복잡하게 구성되어있다. 내적 갈등과 개인적 갈등, 초개인적 갈등까지 모든 범주를 아우르는 갈등 구조를 차용하는데, 그 갈등의 범위가 시간의 순서에 따라 순차적으로 확장되어 극을 절정으로 치닫도록 도와준다.
영화의 초반, 스티븐은 마틴과의 관계를 두고 내적 갈등을 느낀다. 직접 자신의 과실을 인정하는 장면은 영화에서 나오지 않지만, 그는 의료 사고를 범실 한 책임이 본인에게 있다는 것에 죄책감을 느낀다. 때문에 자신의 울타리를 허물고 침범하려 하는 마틴을 떼어내지 못하고, 불편함을 인내하면서까지 시간을 함께 나누는 모습들을 보여준다. 식당에서의 어색한 만남, 시계를 선물하는 것, 마틴의 포옹을 거절하지 못하는 것, 자신의 일터에 갑작스레 찾아온 마틴을 단호하게 타이르지 못하고 직장 동료에게까지 거짓말로 그의 존재를 둘러대며 휘둘리는 모습들에서 시작한다. 무언가 어색하지만 참을 수 없을 만큼의 이질감은 아닌 그 상황들을 보고 있자면 관객도 덩달아 몸이 꼬이는 듯한 불편함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리고 나아가 마틴을 집으로 초대하고, 마틴의 집으로 초대받기까지의 이야기는 상황이 이상하다는 것을 확실히 느낄 수 있다. 마틴은 스티븐과의 만남에서 계속 돌아가신 아빠 이야기를 하고, 아빠와 함께 했던 것들을 스티븐과 나누려는 눈치를 보인다. 집에 반강제로 초대한 마틴은 아빠가 돌아가시기 전 함께 즐겨봤던 영화를 같이 봐줄 것을 요구하고, 늦은 반, 엄마와 스티븐만을 남겨두고 잠을 자러 방에 들어 간다. 이 모든 상황에 스티븐은 마틴을 밀어내고 싶지만 차마 거절할 수 없기에 단호하게 의사를 표현하지 못하고 내적 갈등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
이후 밥의 다리 마비를 비롯한 마틴의 계획이 밝혀지고, 본격적으로 외부적 갈등이 드러난다. ‘마틴과 킴’, ‘스티븐과 애나’, ‘킴과 밥’, ‘킴과 애나’ 구도로 개인적 갈등을 빚기 시작하는데, 이는 가족과 연인 범주의 이야기를 다뤄진다. 애나는 마틴의 아버지가 수술 중 사망한 것에 스티븐의 책임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며, 그 때문에 자신을 포함한 가족이 다 같이 고통 받고 있다는 사실에 스티븐에게 분노한다. 애나의 원망으로 둘의 갈등은 시작되나, 결국 스티븐이 어떤 방법으로도 해소할 수 없는 초개인적 갈등에 무력함을 느끼며 그 답답함을 애나에게 분노의 형태로 표출하기에 이르른다. 킴은 연애 감정 속에 마틴과의 관계를 이어가며 마틴의 계획을 가장 먼저 납득하는 인물이며 그 상황을 덤덤히 맞이하는 유일한 인물이다. 데이트 도중 떠나려는 마틴을 붙잡는 킴에게 마틴은 ‘이해한 줄 알았는데, 짜증나게 굴지마.’ 라며 갈등의 전조를 보여준다. 킴은 이후 자신에게도 다리 마비 증상이 시작 되며, 상황이 더 심각해지자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하고서는 마틴에게 매달리기를 시작한다. 마틴은 그런 킴의 말에 조금도 동요하지 않자, 킴은 손에 집히는 물건들을 마틴에게 마구 던지며 울부짖는다. 킴과 밥은 기존에 그리 절친한 남매 사이는 아니었으나, 마틴의 등장을 기점으로 그 관계가 심각하게 악화된다. 서로 자신이 죽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과시하려는 기 싸움을 펼친다. 킴은 자신이 마틴과의 관계를 강조하고, 밥은 자신을 향한 부모님의 각별한 사랑을 강조한다. 킴은 밥에게 ‘네가 죽으면 네 MP3 내가 써도 돼?’ 라며 둘의 관계에 쐐기를 박기까지 한다.
이렇게 인물들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각자 개인적 갈등을 실현하고, 마지막에 해소할 수 없는 초개인적 갈등에 의해 러시안 룰렛을 통해 운명을 순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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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이라는 캐릭터가 벌이는 도발적인 사건은 이 가족의 중심을 무너뜨릴 만큼의 엄청난 혼란을 초래할 만큼 매력적이다. 스티븐이 구축해 놓은 그의 세계와 삶의 균형을 급격하게 뒤흔들어놓는 힘을 가지고 있어, 스티븐의 적극적인 반응 없이도 서사를 끌고 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어준다. 스티븐을 제외한 가족들의 욕망을 깨워주고 강화시켜주어 많은 인물에게 서사를 진행할 힘을 선사한다. 또 이 영화를 다른 관점에서 보면, 스티븐도 마틴의 삶의 균형을 깨뜨린 도발적 사건의 유발자이기도 하다. 직접 마틴의 아버지를 죽음에 달하게 만든 스티븐은 마틴과 그의 가족이 세워온 삶의 균형을 깨뜨린 범인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둘의 관계를 이분할하거나 선과 악을 구분하고 있지 않다. 때문인지 관객은 영화에서 그 어떤 인물에게도 동정을 느끼지 못하지만, 그것이 이입을 막지는 않는다. 영화가 보여주는 현실의 본질은 초현실의 힘에 압도당했을지라도 자신이 경험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마틴의 도발적인 사건으로 인해 스티븐은 자기 인생에서 처음일 가장 강력한 난관을 마주하며 위기를 맞지만, 그는 어떤 선택이나 결정도 내리지 못한다. 대가를 치러야 하는 애나, 킴, 밥 만이 패닉에 빠질 뿐이다.
셋은 스티븐의 결정에 순응한다. 화를 내보고, 애원도 해보던 이들은 어쩔 수 없이 운명에 목숨을 맡긴다. 그리고 그 절정에서 애나와 킴은 생존의 쾌재를 맛보고, 스티븐은 한 명을 선택해야한다는 부담을 지우게 된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은 아들이자 동생인 밥을 잃고 그들이 가졌던 가족이라는 가치 또한 잃게 된다. 긍정과 부정의 가치가 공존하며 부정적 아이러니를 연출하여 누가 승자인지, 누가 패자인지, 누가 울어야 하는지, 누가 웃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딜레마에 빠진다.
절정의 효과가 낳은 파장은 셋만 남은 가족의 이상한 식사 자리 하나로 설명된다. 외식을 즐기지 않던 그들은 근처 식당에서 끼니를 때우며 아무런 말도 웃음도 없다. 마틴의 의도대로 비극이 실현된 모습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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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갑고 엄중한 분위기의 이 영화는 아가멤논과 이피게네이아 신화를 모티브로 하지만, 부조리극의 형태를 통해 그 신화에 저항하고 있기도 하다. 신화 속 이피게네이아는 아가멤논에게 소중한 딸이기보다, 그가 갖고 있는 총사령관으로서의 책임감을 증명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로서 작용한다. 그녀의 숭고한 희생으로서 트로이 전쟁이라는 상황에서 어려움을 모면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에서 이피게네이아를 상징하는 밥의 죽음은 숭고한 희생이 아니라 강요와 비극으로 그려진다. 아버지인 스티븐에게서 아가멤논의 책임감과 같은 것은 찾아 볼 수 없으며, 밥의 운명에 의한 죽음은 정의를 실현시키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현실 속에서 벌어지는 초현실적인 마틴의 힘은 유신론의 관점에서 볼 때 신적인 존재이고, 무신론의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이 맞이하는 실존적인 조건이자 장애물이다. 마틴이 선택한 행동 원리는 ‘균형’이다. 결국 한 명이 죽도록 궁지에 내몰 계획이면서 굳이 스티븐의 가족들과 사교하는 이유 또한 과거에 스티븐이 한 행동에 따르는 것이다. 킴을 유혹한 다음 거절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스티븐이 자신의 엄마를 거절하는 것과 대칭된다. 마틴은 아버지가 죽은 것임에도, 아버지의 위치에 있는 스티븐을 죽이거나 스티븐의 아버지를 죽이지 않는다. 스티븐의 삶을 차지하고 있는 가족 구성원을 그 대상으로 설정한 것은 본인의 상실의 고통을 스티븐이 느낄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마틴의 등가교환을 더 가시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밥이 총에 맞아 숨을 거둔 장면에서 밥 대신 성인 남성을 등장시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기도 한다. 스티븐이 러시안 룰렛을 시작할 때 애나, 밥, 킴은 테이프로 몸과 입을 감은 후 베개 커버를 얼굴에 쓴 채 소파에 둘러 앉는다. 그리고 자신도 눈을 가리고 빙글빙글 돌던 스티븐은 몇 번의 실패 끝에 밥의 심장을 저격하며 자신의 운명을 이행한다. 그때 나오는 장면이 바로 아래의 사진이다. 엄청난 긴장감이 흐른 직후 미동조차 보이지 않는 밥의 신체가 비춰져 밥이 죽었음을 암시한다. 이것은 스티븐이 아가멤논으로서의 숙명을 실현하고 밥이 이피게네이아로서 희생되었음을 보여주는데, 사실 이 마지막 부분이 신화와는 조금 차이가 있다. 신화에서는 아가멤논이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바치려고 하는 순간 이를 불쌍히 여긴 아르테미스가 마지막 순간 이피게네이아를 사슴으로 바꿔치기한다. 만약 영화에서도 밥의 살해 장면에 밥 대신 마틴의 아버지로 추정되는 다른 성인 남성의 사체를 배치했다면 신화와 더 통일감을 주고, 스티븐을 비롯한 관객에게 더욱 확실한 각인을 심어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아르테미스와 마틴을 동일시하기위함은 아니지만, 아가멤논이 고의로 죽인 사슴과 강압에 의해 죽인 사슴이 동일하듯, 스티븐의 총에 죽은 사람은 밥임에도 마틴의 아빠가 화면에 비춰지며 둘이 희생된 사슴으로서 갖는 동일성을 보여주는 것도 효과적인 방법일 것이다.
<킬링 디어>는 신화를 현실 배경에 차용하며 마틴이라는 초현실의 캐릭터를 설정했다는 부분에서 신선함을 보인다. 또 그것을 흥미로운 방식으로 진행시키며 어색함이 없게 잘 풀어낸 부조리극 형태의 서사가 매우 매력적이게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신화를 차용하는 방식이나 각각의 캐릭터 설정이 흥미로워, 연출적인 측면을 배제하고서라도 충분히 즐길 가치가 있는 영화이다.